본문 바로가기
기념일

6.25전쟁 73주년 '위대한 헌신에 존경과 감사를'

by 카이사르000 2023. 6. 24.
반응형

목차

    이번 주말은 6·25전쟁 발발 73주년이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25 전쟁은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아프고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암호명 ‘폭풍 224’

    암호명 ‘폭풍 224’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아무런 선전포고 없이 38도선을 넘어 기습 남침했습니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한반도는 폐허가 됐고 군인과 민간인 4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겨났고 50만 명의 과부와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생겨났습니다.

     

    6.25전쟁을 비롯해 전쟁 발생에는 당시 환경, 구조, 촉발의 요인이 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냉전이 본격 시작됐다. 그러나 냉전의 씨앗은 이미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심겨 있었다. 제2전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소련과 다른 연합국 사이에 존재했다. 소련은 폴란드에 루브린을 주축으로 공산 괴뢰정권을 수립,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의 분단이 고착됐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제대로 군정을 준비하지 못했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그대로 활용, 남한 사회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해방이후 남한에서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이 정국을 주도했다. 건준은 이후 이름을 인민공화국으로 바꾸었는데 하부조직인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다.

     

    이들은 남한 사회의 혼란을 틈타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 1945년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면서 국내에는 거국적인 반대 운동이 발생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남한에서 공산주의가 급격하게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남한 사회의 대부분이 신탁통치를 또 다른 식민통치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듬해 1946년 조선 정판사 사건, 대구폭동(대구 10.1사건) 등으로 공산주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민족주의 세력이 확장하는 방향으로 정치 지형이 변화됐다. ​

     

    북한에서는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원칙에 따라 1946년 1월부터 토지 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으로 토지개혁을 실시, 북한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로써 북한과 남한은 다시 통합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 전쟁의 마지막 촉발 요인은 김일성이 제공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6.25 전쟁의 환경을 생성했고 한반도의 남북한 분단이 적대적 관계를 형성해 전쟁 구조를 만들었다면 전쟁의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것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정권 수립 초기부터 국토완정을 주장, 스탈린에게 전쟁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한 뒤 50년대 초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을 돕는데 개입하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전쟁을 승인했다. 이후 막대한 장비와 물자를 지원했다. ​

     

    "북이 세운 전쟁 계획은 한달이었다. 27일 작전으로 하루에 15~20km씩 진격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미군이 개입하면서 진격속도가 6km로 떨어지고 7월에는 2km까지 하락했다. 처음에는 소련이 한국 무선정보를 감청해 북한에 제공했으나 이후에는 반대로 됐다. ​ 50년 9월 UN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북한 지원 방법을 모색했다.

     

    소련은 중국군이 참전하기를 기대했으나 정작 중국군의 공중 엄호를 거부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연루되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이들 국가는 북한을 포기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중국이 다시 참전하면서 전쟁은 급변했다. 미국과 중국은 처음에는 과거상태 회복을 위해 개입했다가 한반도를 확보하는 것으로 목표를 확장했으나 전세가 여의치 않아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하기로 한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고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유엔은 어떻게 6·25 발발 하루 만에, 北 규탄 결의안을 냈나

    장면 주미대사 4분간 연설 - 유엔은 6·25전쟁이 발발한 바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 뉴욕 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히 열었다. 유엔은 한국 정부를 초청했고 당시 워싱턴 DC에 있던 장면 주미대사(맨 앞)가 달려가 약 4분간의 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했다. / 유엔

     

    73년 전 발발한 6·25전쟁은 유엔이 처음으로 ‘유엔군’이라는 다국적군을 꾸려 유엔기(旗)를 사용하며 참여한 전쟁이다. 유엔이 1950년 6월 25일(현지 시각) 뉴욕 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UNSC·안보리)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조치는 ‘안보리결의안 82호’ 통과였다. 결의안에는 ‘북한의 남침은 평화를 파기한 것이며 모든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북한이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유엔은 어떻게 전쟁 발발 하루 만에 규탄 결의안을 냈을까.

     

    당시 한국은 유엔 가입국이 아니었지만 안보리 이사국들의 동의하에 이사회 의장의 초청을 받아 발언권을 얻었다.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미 워싱턴 DC에 있던 장면 주미 대사가 대표 자격으로 안보리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뉴욕으로 향했다. 장면 대사는 약 4분간 영어로 북한이 남침했다고 밝히고 “우리의 생존은 유엔에 달렸다”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장 대사의 발언이 표결에 참여한 국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긴박한 모습을 담은 역사적 동영상은 유엔의 온라인 시청각 자료실(UN Audiovisual Library)에 올라 있다.

     

    결의안 82호는 안보리 이사국 11국 가운데 9국이 찬성해 통과됐다. 미국·영국·프랑스·(당시)소련·중화민국(대만) 등 5곳이 상임 이사국이었고, 유고슬라비아·이집트·인도 등 6곳은 비상임 이사국이었다. 공산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는 “북한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며 기권했다. 소련은 아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기권’으로 처리됐다. 외교가에서는 당시 소련의 불참을 두고 ‘미국의 참전을 유도해 전쟁으로 힘을 빼놓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등 여러 설이 돈다.

     

    6.25전쟁 73주년 행사 25일 장충체육관서 거행

    6·25 전쟁 73주년 기념행사가 '위대한 헌신에 존경과 감사를'이라는 주제로 25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된다. 국가보훈부는 23일 이 같이 밝히며 "이번 행사에는 목숨을 걸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전후에는 폐허에서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킨 6·25참전유공자의 헌신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그분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자유의 소중함을 미래세대에게 계승하자는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행사에는 6·25참전유공자, 정부·군 주요인사, 유엔참전용사 후손 교류캠프 참가자 등 15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행사 참가자는 정부가 정전 70주년 계기로 생존 6·25참전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제공한 '영웅의 제복'을 입는다. 행사는 참전국기 입장, 국민의례, 기념공연(1), 제복전수식, 정부포상, 기념사, 기념공연(2), 6·25노래 제창 순으로 50분간 진행된다.

     

    사회자의 개식 선언에 따라 22개 유엔참전국 국기와 태극기, 유엔기가 입장하면 국민의례가 진행된다. 국기에 대한 경례 맹세문은 2023년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6·25참전유공자 남명식 옹과 아들 남덕우씨, 손자 남상혁씨 3대가 함께 낭독한다. 기념공연(1)에서는 일촉즉발의 전쟁터의 참상과 동료 장병들과의 전우애를 274일간 8만여 자로 기록한 '고(故) 박순홍 하사의 6·25진중일기'와 그 아들인 박정래 시인이 아버지를 그리며 위대한 헌신에 감사하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소개한다.

     

    편지 소개에 이어 어린이 합창단인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합창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 6·25전쟁 당시 사용된 태극기 4종과 대한민국이 찾아야 할 돌아오지 못한 12만 1879명의 영웅을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끝까지 찾아야 할 121879태극기'캠페인을 영상으로 집중 조명 한다. 이어지는 정부포상에서는 6·25전쟁 당시의 공적이 최근에서야 확인된 참전유공자 유족 3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한다.

     

    기념공연(2)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총 대신 삽을 들어 마침내 재건해낸 참전용사들의 '기적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를 배우 박성웅씨가 낭독하면 6·25전쟁에 참전한 22개 참전부대기와 참전유공자 대표 7명이 무대에 올라 강한 대한민국으로 지켜달라는 당부와 함께 대국민 거수경례로 참군인의 표상을 보여줄 예정이다.

    이어 행사 참석자 전원이 함께 '6·25의 노래'를 제창하며 행사가 마무리 된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호국영웅들의 위대한 헌신으로 자유를 지켰고, 오늘날 놀랍게 성장한 대한민국의 기반이 되었음을 정부는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할 것"이라며 "그분들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이를 미래세대가 이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