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1953년 7월 27일,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 이곳에 설치된 200여 평의 목조건물에서는 6·25전쟁 휴전이 결정됐다. 1950년 6월 25일 첫 총성이 시작된 민족 상잔의 비극이 3년 1개월여 만에 멈췄다.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이었다.
정전협정은 남북 간 군사분계선(MDL)과 함께 비무장지대(DMZ),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설정했다. 이후 실질적 경계가 된 북방한계선(NLL)은 DMZ와 함께 70년간 남북 간 충돌을 막는 완충지대임과 동시에 대치의 최전선이었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우리의 현실은 참담했다. 미국으로부터 식량, 무기 등을 원조 받던 극빈국이 대한민국의 대표 이미지였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반도체, 전기자동차, 인공위성 등 첨단 산업 수출은 물론 전투기, 전차, 미사일 등 무기를 수출하는 일류 국가로 퀀텀점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가 정전협정 70주년을 계기로 '보훈과 방산'을 국가 미래 전략의 중심에 둔 점은 고무적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 경찰, 공무원, 국민들에게 정당한 평가·대우함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게 윤석열 대통령의 생각이다. 아울러 정부가 민관 합동으로 방위산업 육성을 통해 경제적인 실익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자유연대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도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 발발 엿새째인 1950년 7월 1일. 미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태운 C-54 수송기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안착했다. 6·25전쟁에 최초로 파병된 미군인 스미스 특임대는 같은 달 5일 경기도 오산까지 이동해 죽미령 일대에서 북한군과 맞서 싸웠다.
이들이 참전한 오산 전투는 유엔군이 북한군과 벌인 첫 전투다. 이들의 희생으로 북한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10일 넘는 시간을 소비했다. 그 사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데 이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스미스 특임대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곳에서 ‘헌신으로 얻은 자유, 동맹으로 이룰 미래’라는 표어를 내건 특별한 기념식이 열린다. 26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정전협정 70주년을 맞는 27일 저녁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이 개최된다.
부산 영화의 전당은 스미스 특임대가 처음 도착한 옛 수영 비행장 터에 지어졌다. 보훈부는 “부산 영화의 전당은 정전 70주년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평가했다. 행사에는 데임 신디 키로 뉴질랜드 총독 등 25개국 170여 명의 참전대표단, 유엔참전용사와 후손, 6·25참전유공자, 정부·군 주요 인사 등 4000여 명이 참석한다.
개회 선언에 따라 22개 유엔 참전국 국기와 태극기, 유엔기가 행사장에 들어선다. 방한한 유엔 참전용사 62명이 국방부와 유엔사의 의장대 호위를 받으며 입장하는 ‘영웅의 길’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개회 공연 ‘그날의 기억’에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달려온 유엔군의 헌신을 재구성하는 내용이 담겼다.
재연배우가 등장해 최초로 부산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대의 상황과 대한민국의 첫인상, 참전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어 라온 소년소녀 합창단이 6·25전쟁 당시 ‘해군 어린이 음악대’가 유엔군과 야전병원 환자들을 위해 자주 공연했던 ‘오빠 생각’을 부른다.
국민의례는 올해 해외파병 10주년을 맞은 남수단 한빛부대에 소속돼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의 경력이 있는 부대원 4명이 함께 낭독한다. 보훈부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줄 예정”이라고 전했다. 참전국을 대표해 키로 총독이 인사말을 한다.
정부는 18세에 기관총병으로 참전한 도널드 리드옹(미국)에게 국민포장을 수여하고, 소총수로 참전한 고(故) 토머스 콘론 파킨슨옹(호주)에게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추서한다. 리드옹은 미 한국전참전기념비재단 재무국장을 역임하며 미국의 한국전참전기념비 건립에 기여했다. 고 파킨슨옹은 호주한국전참전용사 협회장을 지내며 호주 한국전참전기념비 건립을 주도했다.
기념공연에서는 2019년 89세의 나이로 영국의 대표 경연프로그램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우승한 콜린 새커리(93) 참전용사가 아리랑을 열창한다. 이어 유엔소년소녀 합창단 등 100명으로 구성된 연합합창단이 아리랑을 합창한다.
유엔 참전국 대표단, 유엔기념공원 참배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지난 22일부터 6·25전쟁에서 한국과 함께 싸운 22개국 정부 대표단과 21개국 참전용사·유가족이 방한했다.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 등 정상급을 포함한 미국, 태국, 벨기에, 프랑스 호주, 영국 등 14개국 정부 대표단이 한국을 찾았다. 8개국은 주한 대사가 대표단 자격으로 참가했다. 참전국은 아니지만 중립국 감독위원회로 활동 중인 체코, 스위스, 폴란드 대사도 포함됐다.
지난 24일부터는 21개 참전국 200명으로 꾸려진 유엔 참전용사와 유가족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유엔군 참전국 정부대표단과 참전용사는 27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는다. 이 공원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소속으로 싸운 국군 장병 36명을 비롯해 미국·영국·호주·캐나다·프랑스·튀르키예·네덜란드·노르웨이·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1개국 전몰장병 2320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참전국 정부 대표단의 유엔기념공원 참배는 베텔 총리와 키토 총독의 개별 참배에 이어 각국 대표단의 합동 참배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룩셈부르크는 6·25전쟁 당시 자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전투부대를 외국에 파병했다. 뉴질랜드군은 전쟁 때 유엔 연합군의 5배나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운 가평전투 승리의 주역이다.
22개국 전우애 상징 ‘아리랑 스카프’ 복원해 선물
보훈부는 이들에게 최대한 예우를 다한다는 방침이다. 6·25전쟁 당시 미군 등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고국의 어머니와 부인에게 선물로 보낸 ‘아리랑’ 스카프를 복원했는데 이를 유엔 참전국 22개 나라 대표들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아리랑 스카프는 전쟁 당시 외국에서 온 군인들을 위한 기념품으로 제작됐다. 처음에는 아리랑 가사를 담지 않았다가 1951년부터 아리랑 악보와 가사를 새겼다. 아리랑은 6·25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정전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아리랑을 열창할 새커리옹은 “함께 근무하던 한국 병사가 아리랑을 자주 불러 저도 금방 친숙해졌다”며 “처음 들었을 때는 자장가인 줄 알았는데 하도 많은 사람이 불러서 나중에는 아리랑이 한국의 국가인 줄 알았다”고 소회했다.
정부는 국제보훈장관회의 등을 통해 6·25전쟁으로 맺은 우호관계를 공고히 하고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되새긴다는 방침이다. 보훈부는 26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호텔에서 국제보훈장관회의를 열었다. 회의 의제는 ‘자유의 가치로 국제사회와 공동 연대’였다. 회의에는 22개 유엔참전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날부터 27일까지 이틀간 국제보훈장관회의에서 각국과의 보훈협력 강화 방안과 6·25전쟁 관련 역사 및 유산 보존·활용 등에 관한 사항을 논의한다. 박 장관은 “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헌신으로 이룬 대한민국 70년간의 번영과 자유의 가치가 동맹과 공유돼 더욱 확고한 연대로 미래 70년을 함께 만들어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위대한 헌신으로 이룬 놀라운 70년(Amazing 70)’
한국은 ‘위대한 헌신으로 이룬 놀라운 70년(Amazing 70)’을 주제로 참전용사와 동맹에 대한 감사를 핵심 키워드로 잡았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부터 ‘제복의 영웅들’이라며 6.25 전쟁 참전용사를 예우했다. 27일을 앞두고는 22개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이 방한했다. 입국한 나라는 미국, 태국,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캐나다, 필리핀, 뉴질랜드, 프랑스, 호주,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튀르키예, 영국 등 14개국이며, 나머지 8개국은 주한대사가 대표로 참가했다. 이들은 25~27일 판문점부터 시작해 부산 유엔기념공원과 유엔참전용사 감사 만찬 등에 참석했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미국과 굳건한 동맹을 입증하는 데에 큰 지분을 할애했다.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도 동맹 70주년 기념의 일환이다. 국가보훈부는 “미국은 6.25 전쟁 유엔참전용사 196만명 중 179만명을 파병했으며, 이후에도 한반도의 안정과 경제발전에 기여한 동맹국”이라고 강조했다. 남북 모두 이렇게 정전을 기념하지만, ‘과도기’인 정전의 다음 단계를 얘기하는 모습은 찾기가 어렵다.
북한은 정전협정체결일을 ‘전승절’이라고 부르며 기념한다. 이름 그대로 북한은 전승절에 승리를 기념하는 화려한 열병식을 펼친다. 미국 매체 미국의소리(VOA)는 21일 민간 위성업체 플래닛랩스가 촬영한 평양 위성사진에 김일성광장 앞과 대동강 건너편을 잇는 대형 부교가 설치됐다고 밝혔다. 또 연합뉴스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20일 ‘위대한 승리의 전통으로 빛나는 7.27’이라는 제목의 사진전람회를 열며 분위기 띄우기에 나섰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3부자를 영웅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특히 북한은 이번 70주년을 기념해 무력시위에도 힘을 쏟고 있다. 22일에도 북한은 핵탑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순항미사일을 서해상으로 기습발사했다.
이대로 가야 하나 바꿔야 하나
이질적인 정전 상황을 기념하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자, 이제는 정전이 아닌 종전과 평화를 기려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분출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2019년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의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정전을 끝내고 완전한 종전을 이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발언 그대로 문 전 대통령은 임기 내에 종전 선언을 이뤄내려 했다. 이해당사자인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며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맞닿을 수 없는 이해관계에 종전 선언은 끝내 무산됐다. 정권이 바뀐 뒤 남북은 하루가 멀다고 훈련과 무력시위를 주고받으며 대치를 이어가는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으나, 북한의 비핵화라는 전제조건에 북한의 방한은 냉담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전 국립외교원장)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올해 70주년이 두개다. 7월 27일은 정전 체결이고 10월 1일은 한미동맹 70주년”이라며 “그런데 지금 정부는 계속 동맹만 얘기하고 있고 정전에 대해선 얘기 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정전 70주년의 의미는 우리가 평화 체제를 가져와야 한다는 과제·부담 같은 것이다. 평화가 절실하다는 것이고 평화가 제일 중요한 가치가 돼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면서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이걸 해결하는 것보다 동맹이 강조된다. 지금 남북의 긴장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분단이 더 강화되고 고착화되는 방향이라며 “우리에겐 굉장히 비극적”이라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그는 “상대방도 살아남기 위해선 똑같이 적대적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며 “누가 봐도 강자는 한국·미국이다. 약자는 마지막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면 ‘강자의 양보’가 전제돼야 하는데 그런 점이 없는 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강자의 양보를 통해 종전 선언이나 평화 협정 등 정전 상태를 끝내는 전향적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의미인데, 다만 이런 시도에 대해 부정적 여론도 있다. 무리하게 정전 체제의 변화를 꾀하기 보다는 현 상태 아래서 최적의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교수는 “정전 협정은 제62항에서 새로운 대체 협정을 만들기 전까지는 이 정전 협정이 계속 유효하다고 돼 있다”며 “불안한 면은 있지만 나름대로 전쟁을 억제하고 있고 위기관리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에 70년을 계속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전협정이 나름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에 무리해서 새로운 협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제 교수는 “북한은 제국주의적인 조건,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조건 하에서는 진정한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라며 “종전선언을 하면 북한을 적대시하는 미군은 나가라 이렇게 선동을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에 대해 제 교수는 “남북한뿐 아니라 동북아에서 미·중·일·러 등 여러 가지 군사적 군형을 유지하는 안정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미군이 없다면 한반도 힘의 공백이 발생하고 불안이 고조된다”고 우려했다. 제 교수는 “종전선언에 매달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 조건 아래서 불가침 합의를 이행 실천한다든가 하는 군사적 신뢰를 쌓아 다방면에 협력을 하는 등 실질적인 평화를 증진하는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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